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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부정공>학헌처사휘연종묘갈명(鶴軒處士諱淵鍾墓碣銘)
鶴軒處士諱淵鍾墓碣銘 淳昌趙氏國中望族以麗朝光祿大夫檢校門下侍中諱璋爲上祖至麗末有諱瑜號虔谷天性至孝前後喪居廬三年中生進文科官副正及 我朝受禪與同志七十二人入杜門洞言志曰首陽山月照我心肝累被徵辟終不就挈家南下順天之當有縣而居焉 國朝命旌其門曰孝子前副正趙瑜之閭士林追慕節行享謙川祠自後雲仍蕃衍簪組烜爀爲東方之大姓此所謂根固而枝茂源清而流遠者非耶日趙友東潤抱狀來示余曰此吾先君事行大畧也墓闕表燧之文願子銘之余匪其人固辭不獲謹按狀公諱淵鍾字聲國號鶴軒虔谷先生十七世孫也中世多顯祖大司成諱琛統制使諱爾重最著焉高祖諱秉謙性潭宋先生門人學識瞻博操履端莊爲士林矜式曾祖諱宇烈承襲庭訓造詣淵深祖諱廷訥早失怙恃執喪如禮考諱寅鉉孝友勤儉廣施恩義四世行蹟昭載湖南三綱錄妣高靈申氏滂女甚進道不幸早歿無育繼妣晋州姜氏婦德兼備 高宗戊寅正月六日生公于住岩面舞鶴里第天品端雅才氣超邁甫解語能讀文字六歲遭父喪哀痛號哭三年不離母側奉命執禮無異成人養偏慈以孝定省之節甘煖之供無不盡誠每出入必吿其事由使家人代行無少欠闕有時物必供進先甞而後入口親癠躬自煎藥櫛縰澣滌不委傍人以故母夫人怡然忘憂鄉里咸稱其孝及丁母艱哀毀踰禮三年不御酒肉省墳無闕其至行大率如此居家未甞廢讀經籍積置案上靜坐嘿誦精研性命之原深究治平之術自庚戌國恥憂憤時事終無可爲則杜門自靖保守靑氈自宗族至鄉黨周窮恤匱無所不至晩年依衆望入校宮重刊邑誌貽惠後人敎子女以義方御奴僕以恩威奴僕有願去者則附其產而許之累有勒削之騷終保先人髮膚竟以壬午六月八日考終于家葬於住岩面無鶴堂頭山巽坐原配扶安金氏學述女忠景公益福后戊寅十二月十三日生天性幽閑貞靜孝養老姑奉承夫君生平無疾言遽色咸稱曰女中君子乙酉六月二十五日卒墓用魯禮生二男五女長房東錫次房東潤女適鄭雲鉉任昞淳梁喆承金永春梁玉容長房孫麒勲佶勲次房孫禎勲究勲義勲枰勲增勲鄭周澤任聖彬梁東玉金淡洙金基洙梁基弘其外孫也曾玄以下不盡錄嗚呼公以天挺資品生長詩禮古家佩服庭訓躬行孝悌其精博之學卓犖之材足以有爲於世而遭時不辰未展蘊抱終老林泉當此社屋之秋時發長嘆短吁每見其貧窮之人廣施溫仁之恩若非忠厚之德蘊于中而著於外則安能如是乎此公之平生大畧而其餘非愚拙愚所敢贅也系之以銘曰 靈芝有根醴泉有源忠孝名祖爰有賢孫謹飭其行簡黙其言承述先業垂有後昆有斐君子終不可諼 歲丙午孟秋 濟州 梁壬承 謹識 학헌처사휘연종묘갈명(鶴軒處士諱淵鍾墓碣銘) 순창 조씨는 나라의 망족으로 고려 광록대부 검교 문하시중 휘 장(璋)을 상조로 하고 고려말에 휘 유(瑜)의 호는 건곡인데 천성이 지효하여 전후상에 삼년을 시묘하고 생원진사 문과로 벼슬이 부정인데 조선에서 자리를 물려 받을 때 七十二인과 더불어 두문동에 들어가 뜻을 말하기를, 「수양산 달이 나의 마음과 간장에 비춘다」하고 여러 번 부름을 받고도 마침내 나아가지 않고 집안을 끌고 남중 순천 고을 富有縣으로 내려와 살았다. 나라에서 그 문을 정포하여 가로되, 「효자 전부정 조유의 이문이라」하고 사림이 그 절행을 추무하여 겸천 서원에 향사하였으며 이 뒤로부터 자손이 번성하고 작록이 혁혁하여 동방의 대성이 되니 이른바 뿌리가 굳으면 가지가 무성하고 근원이 맑으면 후름이 길다는 것이 아닌가. 하루는 벗 조동윤(趙東潤)이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이는 내선군 사행의 대략인데 묘도에 수도를 표할 글이 없으니 원컨대 자네는 새겨 달라」 하므로 내가 그 사람이 아니라고 굳이 사절하다가 부득이 하였다. 삼가 장문을 살피니 공의 휘는 연종(淵鍾)이요, 자는 성국(聲國)이며 호는 학헌이고 건곡선생 十七세 손이며 중세에 현조가 많았는데 大司成 휘 침(琛), 통제사 휘 이중(爾重)이 가장 뛰어났다. 고조의 휘는 병겸(秉謙)인데 성담(性潭) 송선생의 문인으로 학식이 정박하고 조행이 단장하여 사림의 모범이 되었다. 증조의 휘는 우열(宇烈)인데 庭訓을 이어받아 학문이 깊었으며, 조의 휘는 정눌(廷訥)인데 일찍 부모상을 당하여 예에 따라 집상하였고 고의 휘는 인현(寅鉉)으로 효우 근검하고 널리 은의를 베풀었으며 四세 행적이 호남 三綱錄에 상세히 실렸고 비는 고령 신씨(高靈申氏) 방(滂)의 따님으로 심히 부덕이 있었으나 불행하여 일찍 돌아가고 생산이 없었으며 계비는 진주 강씨(晋州姜氏)로 부덕을 겸비하였다. 고종(高宗) 무인년(戊寅年一八七八) 一월 六일에 주암면 무학리에서 공이 출생하였는데 천성이 단정하고 바르며 재기가 뛰어나 겨우 말을 해득할 때에 글을 읽고 六세에 부친상을 만나 부르짖어 울며 三년을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명을 받들어 執禮한 것이 성인과 다름이 없었다. 어머니를 효도로서 봉양하여 문안한 절차와 좋은 반찬으로서 봉공에 정성을 다하며 매양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그 사유를 고하고 집사람으로 하여금 다행케 하여 조금도 빠뜨림이 없게 하고 철따라 나는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공손이 바쳐 먼저 맛보아 뒤에 올렸다. 어버이가 병이 나시면 몸소 스스로 약을 달이고 머리를 다듬고 세탁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아니한 고로 모부인이 기뻐하고 근심을 잊으며 향리에서는 다 그 효행을 칭찬하였다. 어머니 상사를 만나 禮보다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이 상했으나 三년을 술과 고기를 먹지 아니하고 성묘를 궐함이 없었다. 그 지극한 행실이 대략 이와 같았다. 집에 있으며 일찍 독서를 폐하지 않고 경전을 서상위에 쌓아 두고 고요히 앉아 가만히 외우며 性命의 근원을 정밀히 연구하고 치평의 술책을 깊히 탐구하였다. 경술년(庚戌年一九一○) 합방 이후로 울분한 시사를 마침내 할 수 없으니 문을 닫고 스스로 獻靖하며 고적을 보수하였다. 종족과 고을에 궁한 자를 돕고 모자란 자를 구휼하여 이르지 아니한 곳이 없었다. 만절에 중망에 의하여 향교에 들어가 읍지를 중간하고 후인에게 은혜를 끼쳤으며 자녀를 옳은 길로 가르치고 노복을 은혜로 거느리며 노복이 가고자 한 자가 있으면 가산을 딸려 보내었다. 여러 번 삭발의 소요가 있었으나 끝내 선인 발부를 보수하다가 마침내 임오년(壬午年一九四二) 六월 八일에 집에서 고종하니 주암면 舞鶴堂 頭山 巽坐原에 안장하였다. 부인은 부안 김씨(扶安金氏) 학술(學述)의 따님으로 충경공 익복(益福)의 후손인데 무인년(戊寅年一八七八) 十二월 十三일에 출생하여 천성이 유한 정정하고 효도로 부모를 봉양하며 군자를 공경하고 평생에 모진 말과 급한 빛이 없으니 다 여중 군자라 칭도하였다. 을유년(乙酉年一九四五) 六월 二十五일에 별세하니 묘소는 魯 나라의 예를 따라 썼다. 아들은 동석(東錫), 동윤(東潤)이요, 딸은 정운현(鄭雲鉉), 임병순(任晒淳), 양철승(梁喆承), 김영춘(金永春), 양옥용(梁玉容)의 처며 장방손은 기훈(麒勲), 길훈(佶勲)이고 차방손은 정훈(禎勲), 구훈(究勲), 의훈(義勲), 평훈(枰勲), 증훈(增勲)이요, 정주택(鄭周澤), 임성빈(任聖彬), 양동옥(梁東玉), 김담수(金淡洙), 김기수(金基洙), 김인수(金仁洙), 양기홍(梁基弘)은 그 외손이고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아, 공이 하늘에서 빼어난 자품으로 詩禮 고가에 생장하여 정훈을 가슴에 새겨 몸소 효제를 행하니 그 정박한 학문과 초월한 재목으로 족히 세상에 쓰일 것인데 때아닌 때를 만나 쌓인 포부를 펴지 못하고 임천에서 일생을 마치었다. 이 나라가 망한 때를 당하여 때때로 정탄식만 할 뿐이었다. 매양 빈궁한 사람을 보면 널리 어진 은혜를 베풀었으니 만일 충후한 덕이 훙중에 쌓여 밖에 나타나지 아니하였다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을 것인가. 이것이 공의 평생 대략이요, 그 나머지는 우졸한 나로서는 감히 보탤 바가 아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銘한다. 신령한 지초가 뿌리가 있고 靈芝有根 단술샘이 근원이 있으니 醴泉有源 충성하고 효도한 이름난 선조가 忠孝名祖 이에 어진 손자를 두었다. 爰有賢孫 삼가 그 행실을 꾸미고 謹飭其行 간략한 그 말씀이 묵중하다 簡黙其言 선업을 이어 기술하여 承述先業 후손에게 또 남기었다 垂有後昆 문채 있는 군자를 有斐君子 마친내 가히 잊지 아니 하리로다. 終不可諼 제주(濟州) 양임승(梁壬承)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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